11월, 감사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감사생활은 신앙인의 마땅한 바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신앙의 힘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실력이 감사생활이라 믿습니다. 감사하는 삶에는 행복과 형통이 따르지만, 불평에는 모든 삶이 더욱 꼬이고 고통만 따르기 때문입니다.
서아프리카에 ‘맛지’라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부족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합니다."라는 말 대신 "내 머리가 흙 속에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당신이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황송해서 머리가 흙 속에 박힐 정도로 고개가 숙여집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풀어도 아무런 표현이나 보답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주둥이를 닦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고도 "입을 싹 닦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고, 농부가 있어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감사를 해야 할 더 중요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사, 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를 잘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 실제로 내게 은혜를 끼친 사람들에게 조차 감사하는 일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남이 나를 힘들게 한 일을 더 잘 기억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남에게 잘 한 일을 더 잘 기억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죄인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래 목회를 해보니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목회 가운데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감사를 잘 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를 모르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감사를 잘 하는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감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감사 인사, 감사의 답례를 잘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감사의 표현을 잘합니다. 큰 어려운 일을 당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빚진 마음이 생겨 감사를 잘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감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를 배우고 습관화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도 작은 일에 감사를 표하고, 어디서든지 남에게 섬김(서빙)을 받을 때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나아가 주변에 감사한 분들께 감사의 답례를 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감사를 생활화하고, 습관화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사일기’를 꾸준히 써볼 것을 건의합니다. 적어도 이번 주일부터 연말까지 3주간만이라도 감사 일기를 써봅시다. 작년에는 3주간 매일 자기 전 세 가지 이상씩 그날 일어난 일 중에 감사할 일을 써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실제로 실천하면서 마음속에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살아났다는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올해는 더욱 더 수고스럽지만 일과에 생긴 감사한 일들을 떠올리며 모든 기억을 짜내며 감사의 일기를 써봅니다. 더욱 풍성한 감사생활로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9월 한달 간 성경공부반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입체적이면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영혼의 작가라고 불리는 켄 가이어(Ken Gire)는 ‘폭풍 속의 주님’이란 책에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경험’을 우리에게 나누면서 폭풍과 천둥, 번개 역시도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임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폭풍이나 슬픔 가운데 찾아와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체험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제가 해결되고 인생의 폭풍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나의 선택과 적절한 대처를 앞세우며 ‘스스로’를 다시 부각시키곤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완벽한 ‘나’가 되기 위해 힘쓰다가, 결국 지치게 되고 폭풍 한 복판에 이르러서야 다시 낙심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일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의 문제는 녹녹지 않다. 물론 기도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바꾼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최고의 기적은 마음의 평안, 곧 그리스도의 평안이다. 분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매우 심오한 평안이다. 마약에 중독된 자녀는 돼지 사료를 먹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취업은 막막하고, 암은 악화되고, 결혼 생활은 엉망이 된 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에게 깃드는 평안. 하지만 내가 아는 비밀이 있다. 풍파를 잠재우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내면의 기적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다.”
시편 5편 기자는 11절에서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폭풍 가운데 평안을 누리며 즐거워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주의 보호 아래 피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폭풍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켄 가이어는 이렇게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 사나운 물결을 만났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보내시여 내 눈을 열어 주세요. 주님의 확실하고 분명한 구원을 보고 싶습니다. 나의 인생에 홍수가 나서 물이 차오를 때, 주님의 위로하시는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최근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에게 인생의 폭풍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평안의 기적이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기도도 기도이지만 다시 우리 주님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피해야합니다. 이번 한 달 간 사복음을 종합하여 예수님에 대해 다시 총체적으로 배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은 주님에게 있으니 그에게 피하여 위로와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그를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운전을 하면서 교통신호를 잘 지키십니까? 운전자의 입장에서 교통신호를 잘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죠. 그러나 때로 신호를 잘 지키는 것이 매우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교통 티켓을 받고, 범칙금을 내고 난 후에는 경찰의 눈치를 보게 되고 행동 하나 하나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게 되는지 모릅니다. 선생님께 혼이 난 학생처럼 애매한 상황일 때는 더 우왕좌왕하고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행동과 판단이 법에 걸리는 일은 아닌지 긴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혹 교통 티켓을 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신호등이 녹색등일 때만 빼고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게 다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신호를 잘 지킨다는 것이 어떨 때는 매우 불쾌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일어날 상황은 명약관화입니다.
중앙선은 넘지 말아야 하고 빨간등은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켜야 할 규칙들과 상식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또 지식적으로도 맞고 틀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말씀과 원칙들을 지키는 것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왜 하면 안 되지? 손해 보게 하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그 모든 제한들을 다 폐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고 나면, 그 법을 어기고 나면, 여지없이 후회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노란색 신호등이 들어올 때는 가능한 한 멈추어야 합니다. 빨간등이 들어올 때 멈추면 늦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빨간등이 들어왔는데도 멈추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납니다.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고 조심해야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더욱 붙잡고 기도해야 할 때, 더욱 말씀에 집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노란불이라면 잠시 멈추어 서서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수상까지 지낸 신학자요 목사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모든 지음 받은 생명체는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놓으신 자신의 존재를 위한 자신만의 법칙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합리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이러한 신적 질서와 법칙의 본질을 알고 그 질서와 법칙을 삶의 기초로 사용하는 거겠죠.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에는 법칙이 존재하며, 이런 법칙을 무시할 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낭떠러지 앞에서 멈추지 않고 더 걸어 나가면 아주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쯤은 압니다.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는 도덕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어떤 행위는 예측할 만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간음을 멋진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분노와 질투, 상처와 가정 파괴,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불러오며, 도덕법을 거스르는 것은 죽음도 불러옵니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중독되어서 차를 몰 때 남들은 물론 자신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인생의 도덕적 법칙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성경은 ‘지혜’ 라고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재주’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리적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에서도 피조세계의 한계와 범위, 법칙과 리듬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리석음은 고집스럽게 우주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 나가는 것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침을 뱉는 것이며 정해진 선 밖에다 선을 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현실에 대해 우리 스스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며, 그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는 마치 눈먼 운전자가 마주 오는 다른 차를 들이받는 것처럼 현실과 아주 고통스러운 충돌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확실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명령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안타깝게도 점점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한 영혼의 구원 못지않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의 법과 질서’ 위에 돌려놓는 문화명령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위대하고 큽니다. 늘 진리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므로 역리가 아니라 순리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은 한국 교회에서는 잘 지키지 않지만 카톨릭과 신교 중에서는 루터교회 등이 지금도 정식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재의 수요일’엔 미사 중에 사제가 신자들에게 머리에 죽음을 상징하는 재를 발라주며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3:19)”라고 말하고 이때 신자는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 예식은 참회의 뜻을 일깨워 참된 회심으로 돌아오기를 가르쳐 주는데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신 축제의 날이므로 사순절의 날로 보지 않았다.) 이 사순절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사순절에는 금식을 행하고 말과 행실을 조심하며 지냈습니다. 중세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결혼식과 음주가무를 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순절의 가장 큰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활절을 뜻 깊게 지키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교회 절기는 초대교회부터 자연스레 지켜 지다가 전통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부터 부활절을 앞두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금식하며 행실을 경건히 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부터 금식을 시작하기도 했고 부활절 전 한 주간을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순절을 정하여 공식적으로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AD 325년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40일이라는 날 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하신 것(마4:2)과 시내산에서 모세가 40일간 금식한 것(출24:18),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가기 전 40일간 금식(왕상19:8)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같이40일이란 기간은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정점에 부활절이 있고 이 부활절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맛보게 하는 환희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아무 준비과정 없이 부활절을 맞고 단 하루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사순절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아서 일상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크네스’라는 윤리학자는 오늘날의 현대 현실을 두고 '상실의 시대'라 했습니다. 이 말은 현대인들에게 ‘물질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가진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못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충분히 가졌는데 가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이처럼 ‘가진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습관화 되면 ‘상실감’에 빠지고, 더 나아가 상실감은 ‘소외감’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결국 고독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현대는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을 앞지르고 있다고도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전망 좋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림 같은 경치를 볼 때에 ‘참 좋다’고 느끼는 것으로도 좋을 텐데 ‘저기 보이는 저 큰 집은 누구 집이지? 그 넓은 대지는 누구 것이지?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뭘!’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데는 돈도 안 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굳이 ‘저것이 누구 것이냐? 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즐기지 못하고 소유를 따지며 상실감에 빠지는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경치’라는 것은 먹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넣어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면 그냥 자기 것인데도 말입니다.
나이야가라 폭포와 관련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직접 구경하신 분들도 있고 못 가보았어도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 웅장한 광경을 보면 참으로 장관입니다. 그런데 큰 물줄기가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날리며 떨어지는 그 장관을 바라보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거는 미국 거다” “아니다, 캐나다 거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있으니까 양쪽 다 거다” 하고들 폭포의 소유권을 놓고 사로 떠들고 있는 꼴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쐐기를 박아 말하더랍니다. “아닙니다, 저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경하는 비용도 안주고 그냥 보면서 즐길 수 있으니 저 경치는 우리들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빚어 놓으신 것이고 내가 지금 보고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내 것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고 경치나 온전히 감상했으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가서 ‘내 것이다 남의 것이다’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유의식이 확실치 못하고 잘못돼 있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시가지 한복판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도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넓은 세상은 등지고 부스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과도 같은 의식으로 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늘 궁색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 가시길 축복합니다. 배인찬 목사
새해 벽두부터 전세계적인 이상기후로 지구촌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도 엇그제 화씨로 13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모든 교우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이 무심코 던진 말에 마음 베이지 않고, 내가 욱하여 내뱉은 말에 남이 다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며 보람을 느끼며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잠잠하게 웃고, 눈물은 조금만 흘렸으면 좋겠습니다. 새해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너무 계산하지 않고,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태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새해에는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반드시 지킵시다(출 20:10).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행위입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일, 토요일 기도회도 최선을 다합시다(히 10:25).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꾸준히 성경을 통독하고 매일 아침 말씀으로 시작합시다(딤후3:16).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으로 기도합시다(살전 5:17).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신 축복을 생각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바칩시다(말 3:8-10).
<충성>은 주님께 내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됩시다(마 25:21).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한 두 사람을 마음에 두고 꾸준히 신앙을 권합시다(행 1:8).
올해도 우리는 때로 두려워하며, 때로는 사무치도록 아파하며, 때로는 어두운 현실 앞에서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 주시며 변함없이 우리 곁에서 응원해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린 충분히 행복한 거고 넉넉히 이긴 겁니다. 늘 고된 현실에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소원합니다.
미국에는 소위 ‘둠스데이 프레퍼스’(Doomsday Preppers)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태양 폭발, 혜성 충돌, 자기장 역전, 대륙 이동 등의 자연 재앙이나 핵전쟁, 신종 바이러스, 석유 대란, 경제 붕괴 등의 인위적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구가 멸망하게 될 날이 가까웠다고 믿고서 그날을 대비하고 있는 자들인데, 정말 온갖 것들을 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몇 주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식수와 식량을 늘 보관해 놓는 정도는 그저 기본에 불과하며, 자연 상태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연습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약 3개월 동안 자기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통조림만으로 준비해 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폭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총기와 탄약을 마련해 놓고 집 자체를 요새처럼 건축하는가 하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특수 지하벙커까지 제조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날'이란 문자 그대로'둠스데이' 즉 ‘망하게 되어 있는 운명의 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와 인류가 정말 그런 대재앙으로 끝나게 된다면 아무리 대비란 것을 해 보았자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뿐이지 결국은 다 똑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예언해 주고 있는‘마지막 날’은 결코 그런 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 날은 우주적 재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며 인류의 자멸이 아니라 ‘백보자의 심판’으로 종결될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둠스데이 프레퍼스'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날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영생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 만날 날을 준비하며 살았던 신자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또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 오는 이 연말에 ‘만물의 마지막’을 향하여 성경이 카운트다운을 해 주는 그런 소리를 듣는 성도가 되고, 오직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며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 주며,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생과 만물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우리 신자가 어찌 자신의 정욕적인 삶만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혹 오늘 밤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가시거나 내일 주님께서 재림 하실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늘 명심하면서 바로 ‘오늘이라는 이 날’을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준비를 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 2023년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만큼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은 너희들에게 허락되었지만 일반 백성들(불신자)에게 숨겨져 있어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 즉 영원한 생명의 길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며 저주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는 것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며 복이라고 하셨습니다.(마13:11-16절)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요? 그 답은 누가복음 19:42절에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라는 말씀에 잘 나와있습니다. 여기 보면 그들에게 숨겨진 사실은 ‘평화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보면 “보살핌을 받는 날” 즉 ‘심판에 관한 일’(44절)도 모른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닫지 못하는 ‘평화에 관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 입니다. 즉 예수께서 죄의 저주에서 풀어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오셨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나 깨나 오매불망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지만,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방법과 하시는 일이 자신들의 소망과 생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육신적인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자유 국가를 세워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관심이 다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약한 인간 예수를 거절하고 배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섬기는 일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욕망에 마음이 가려져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육신적인 평안’만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실패하고 머지않아 패망당한 이유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깊이 교류할 수 있는 영이 어두워지면 보이는 것은 세상적인 것뿐입니다. 우리도 육신적인 문제만 집착하다가 영이 어두워지면 세상적인 것만 보이게 됩니다. 내면의 세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늘 의식주생활이 걱정되고, 자식이 걱정되고, 장래가 염려됩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신경 쓰고 살아야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만 집착하게 되면 개인적 종말(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조차 깨닫지 못하고, 나아가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우선적인 일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잘하며 살아갑시다.
지금 교회는 대강절(대림절) 절기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맞이하기 4주 전에 시작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성탄절을 올바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대강절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망과 정의, 평화, 사랑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을 고대하며 신앙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서 대강절은 첫 번째 절기에 해당합니다. 그 이후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 등 일곱 개의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대강절은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합니다. Adventus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린다’(Advent)는 뜻처럼, 대강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오늘날 현실 속에서 교회가 제 몫을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온전히 들어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신자마다 교회마다 '오신 주님'을 제대로 신앙 하지 못하여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마음이 약한 것이 큰 원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대강절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탄절에 가서 허겁지겁 오신 주님을 형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신자들 각자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란다면 이 대강절 시간에 은총을 고대하는 맘으로 신앙을 점검하고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켜서라도 세상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진심 가득한 빈방을 예비하여 소망으로 응답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우리는 이미 주신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여기서 얼마큼 천국을 미리 당겨 살아가고 있는지도 돌아봅시다.
우리 모두 신자로서의 삶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에서 사랑과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가 더 분명하게 현현될 수 있는 대강절이 되길 소망합니다. 샬롬!!!